Thursday, April 3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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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GOSPEL WITHOUT FENCES___ Thursday (04/30/'26): St. Worships & Gospel Demos with Silicon Valley Neighbors


No wire can hold what love has already crossed.
No boundary can contain what mercy has already named its own.
The Gospel does not stand at the gate—it walks the road beyond it.
Where we divide, it gathers.
Where we close, it opens.
Where we measure, it gives.

The fence remains only where the heart refuses to follow.

Pastor Steven G. Lee
St. GMC Corps
April 29, 2026

Wednesday, April 2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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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IVINE PURPOSE OF TIME___ Tuesday (04/28/26): St. Worships & Gospel Demos with Berkeley/Oakland Neighbors
Time was never empty.
Before it was counted,
before it was measured,
before it was feared or wasted—
it was given.
Not as a container to fill,
but as a path to walk.
Not as something to control,
but as something to answer.
Time moves, yes—
but not aimlessly.
It leans.
It gathers.
It draws all things toward a meaning
hidden within its passing.
Every hour carries a quiet intention,
every moment a seed unseen,
waiting not for observation,
but for response.
We thought time was ours—
to spend, to delay, to lose.
But time has always belonged
to something greater.
It does not ask for efficiency.
It asks for faithfulness.
Not how fast you moved,
but whether you loved.
Not how much you achieved,
but whether you answered.
There is a purpose woven into time
that cannot be rushed
and cannot be escaped.
It appears
in the interruption you did not plan,
in the face you did not expect,
in the moment you almost ignored.
And there—
without announcement—
time fulfills its meaning.
Time is not fulfilled at the end.
It is fulfilled
in the moment it is received.
In the turning of the heart,
in the act of mercy,
in the courage to remain
when leaving would be easier.
There is a divine patience within time—
a waiting that does not force,
a calling that does not shout.
Yet it persists.
Through all the noise,
through all the speed,
through all the ways we try to outrun it—
time remains
what it has always been:
A gift that carries a will.
A moment that carries eternity.
A calling that carries the voice of God.
And so time continues,
not merely passing,
but approaching—
until the moment
you no longer measure it,
but finally
understand why it was given.
Pastor Steven G. Lee
St. GMC Corps
April 27, 2026





Tuesday, April 28, 2026

 THE REVERSAL OF EXCLUSION — GRACE AT THE CENTER


The story of Scripture does not end where separation began.

What was once guarded by distance
is now opened by mercy.
What was once defined by exclusion
is now fulfilled in invitation.

The Old Testament reveals a people learning holiness through boundaries—through distinction, through separation, through the visible marking of what is clean and unclean. These boundaries were not meaningless; they taught reverence, identity, and the cost of sin. But they were never meant to be the final word.

In the New Testament, the center shifts.

Not away from holiness—
but toward a holiness that moves outward.

Jesus does not abolish purity—He redefines its direction.

He touches the leper.
He calls the tax collector.
He eats with sinners.
He receives the woman, the child, the poor.

Those once held at a distance
are now brought near.

This is not the lowering of God’s standard.
It is the revealing of God’s heart.

The unclean are not affirmed in their condition—
they are restored in His presence.

The excluded are not left outside—
they are invited into transformation.

Even the boundaries of nations begin to fall.

Samaria—once avoided—becomes a field of grace.
Gentiles—once “not a people”—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The Ethiopian eunuch—once barred by law—is received without hesitation into the new covenant.

What the law could not complete,
grace fulfills.

But this inclusion is not careless.

The New Testament does not remove all forms of separation—it transforms their purpose.

There is still a “cutting off,”
but now it is no longer about protecting status—
it is about restoring souls.

When the church separates from unrepentant sin,
it does not do so to condemn—
but to awaken.

Not to discard—
but to call back.

Not to close the door—
but to bring a person to the threshold of repentance.

Because the final aim of grace is not inclusion alone—
it is reconciliation.

This is the great reversal:

Holiness no longer stands at a distance from the broken—
it walks toward them.

Righteousness is no longer a wall—
it becomes a bridge.

And the people of God are no longer defined by who they exclude—
but by how they embody the mercy that included them.

So the question is no longer:
“Who is clean enough to come near?”

But:
“Who will go near, carrying the grace they themselves have received?”

Because in Christ,
the boundary line has been crossed.

And now the cross itself stands at the center—
not as a barrier,
but as an open door.

Pastor Steven G. Lee
St. GMC Corps
April 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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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신성한 목적

THE DIVINE PURPOSE OF TIME


시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았다.

헤아려지기 전,

측정되기 전,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낭비되기 전—

시간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채워 넣어야 할 그릇으로서가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로서.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응답해야 할 부름으로서.


시간은 흐른다, 그렇다—

하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한쪽으로 기울며,

모든 것을 모아들이고,

흐름 속에 감추어진

어떤 의미를 향해 만물을 이끌어 간다.


매 시간은 조용한 의도를 품고 있으며,

매 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저 관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응답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우리의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대로 쓰고, 지체시키고, 잃어버려도 되는 우리의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더 위대한 어떤 것의 소유였다.


시간은 효율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신실함을 요구할 뿐이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가 아니라,

사랑했는지를 묻는다.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응답했는지를 묻는다.


시간 속에는 어떤 목적이 엮여 있다.

서두를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는 목적이.


그 목적은 모습을 드러낸다.

계획에 없던 방해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얼굴 속에서,

하마터면 무시하고 지나칠 뻔했던 순간 속에서.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간은 그 의미를 온전히 이룬다.


시간의 완성은 끝에 가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바로 그 순간,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에 완성된다.


마음이 돌이켜지는 순간에,

자비를 베푸는 행위 속에서,

떠나는 편이 훨씬 쉬웠을 텐데도

굳건히 머물기로 택한 용기 속에서.


시간 속에는 신성한 인내가 깃들어 있다—

강요하지 않는 기다림이요,

고함치지 않는 부르심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온갖 소음 속에서도,

숨 가쁜 속도 속에서도,

시간을 앞질러 보려 애쓰는 우리의 온갖 시도 속에서도—

시간은 변함없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의지를 품은 선물로서.

영원을 담은 순간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부르심으로서.


그리하여 시간은 계속된다.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마침내 당신이 더 이상 시간을

재고 따지지 않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왜 당신에게 주어졌는지

온전히 깨닫게 되는 그 순간까지.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27일 


> 시간이 구원이 될 때 

WHEN TIME BECOMES SALVATION 


시간이 더 이상 당신이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당신이 '응답해야 할' 대상이 될 때,

시간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비가 깃들 때,

그 순간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저 스쳐 지나가기를 거부할 때,

그 시간은 더 이상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시간의 끝자락에서 기다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시간 바로 그 안에서,

고요히,

당신이 미처 지나칠 뻔했던 그곳에서 나타납니다.


'지금'이라는 현재가 거룩해지는 것은

그 시간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이 온전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 속에서,

시간은 더 이상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이 됩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27일 


> 성취된 시간 — 복음의 자비로운 시간

TIME FULFILLED — THE GOSPEL HOUR OF MERCY


복음은 시간이 단지 흘러가는 순간들의 공허한 연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취되는, 신성하게 질서 잡힌 응답의 장임을 선포합니다. 그분 안에서 시간은 그 정해진 목적에 도달합니다. 이는 단지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현재로 임한 자비로서 말입니다.


"그 시간이 이르렀다"는 선언은 단순히 연대기적 흐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시간은 희생과 구속, 그리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향해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hour)"은 모든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정립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속 기간'이 아니라, 신성한 목적에 대한 '순종'입니다.


따라서 현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매 순간은 도덕적, 영적 책임을 수반합니다. "낮 동안에 일하라"는 말씀은 시간을 유한하고도 긴급한 '위탁물'로 규정합니다. 그 안에서 진리와 자비, 그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기회는 실재하는 동시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체함은 단지 일을 뒤로 미루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바로 그 목적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박함의 근거는 불안이 아니라 영원함에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라고 선언하시는 분은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면서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계시며, 이로써 모든 순간이 영원한 실재 앞에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그 자체로 궁극적인 실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도 아닙니다. 시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붙들리고, 심판받으며, 성취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시간"이란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수렴되는 지점입니다.

신성한 의도(하나님의 뜻),

인간의 책임(응답하라는 부르심),

영원한 중요성(하나님 앞에서 각 순간이 지니는 무게).


이러한 관점 안에서 시간은 구속(redemption)됩니다. 시간은 더 이상 단순히 소모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닫고 응답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시간을 가늠하는 척도는 효율성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즉, 그 순간이 진리와 자비, 그리고 사랑으로 채워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그 "시간(hour)"을 제대로 인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서 시간은 자비가 실천되고,

진리가 삶으로 살아내어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바로 '여기, 지금'—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27일 


> 영원 앞에 선 현재

THE PRESENT STANDING BEFORE ETERNITY


현재라는 순간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게 느껴질 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1초,

덧없이 사라지는 한 호흡,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조각 파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훨씬 더 중대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현재는 홀로 스러지지 않습니다.

현재는 영원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시간이 아무도 모르게 흘러가 버리는 양,

마치 순간들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지는 양 살아갑니다.

그러나 현재의 그 무엇도 소실되지 않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모든 말,

침묵으로 지켜낸 모든 순간,

베풀었거나 혹은 베풀지 않은 모든 자비의 행위는—

결코 희미해지지 않는 하나의 실재 속으로 옮겨집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자락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영원은 바로 현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현재는 더 이상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는 엄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단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닌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지금 행하는 일은

단지 '지금'이라는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받아들여지고,

기억되며,

마침내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시간을 피해 도망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직시하고 깨달으라고 부릅니다.

"바로 지금이 그 시간이다."

"바로 오늘이 그 날이다."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이것들은 추상적인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현재를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곧, 하나님의 시선 아래 서 있는 순간으로 바라보라는 초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절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그 영원하신 분께서

동시에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단지 심판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강퍅해졌던 마음도 돌이킬 수 있습니다.

미루어 두었던 사랑도 지금 시작할 수 있습니다.

놓쳐버렸던 순간의 아쉬움도

바로 지금, 신실함으로 채워진 순간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가 지닌 무게이자

동시에 현재가 지닌 경이로움입니다.

현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시는 장소입니다.

단지 심판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당신을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그저 지금이 몇 시인지 묻는 데서 그치지 마십시오.

대신 이렇게 물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이 순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왜냐하면 현재는 결코 아무도 모르게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엄연히 서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히 보이고,

모든 것이 온전히 알려진 채로—

바로 영원 앞에 서 있습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27일  


> 알고리즘에 앞서는 복음

THE GOSPEL BEFORE THE ALGORITHM


현대 사회는 인간의 행동을 대규모로 수치화하고, 예측하며, 최적화하는 알고리즘 시스템을 통해 인간의 삶을 점점 더 질서 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들은 데이터에서 패턴을 추출하고,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통해 가치를 부여하며, 계산된 우선순위에 따라 주의를 유도함으로써 작동합니다. 이러한 틀 안에서 시간은 자원이 되고, 주의(관심)는 화폐가 되며, 인간 존재는 더 큰 통제와 효율성의 시스템 속에서 일련의 변수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질서에 맞서 복음이 우뚝 서 있습니다.

복음은 단지 시간적인 순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알고리즘에 앞섭니다. 복음은 현실을 데이터의 집적이나 예측 능력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자비,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으로 정의합니다. 알고리즘이 행동을 예측하고 형성하려 하는 반면, 복음은 인간을 자유와 책임으로 초대합니다. 복음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재를 불러세웁니다.


이러한 구별의 핵심에는 가치의 본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알고리즘 시스템은 참여 지표, 성과 지표, 행동 결과물 등을 통해 외부적으로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에 반해 복음은 측정이나 유용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내재적 가치를 확증합니다. 인간은 수치화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보여지고 알려진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경쟁하는 시간적 틀을 만들어냅니다. 알고리즘은 가속화, 최적화, 그리고 끊임없는 피드백 순환을 통해 시간을 지배하며, 처리되고 확장될 수 있는 것들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반면 복음은 시간을 '카이로스(kairos)'—즉 응답을 위한 정해진 순간—속에 위치시킵니다. 그곳에서 의미는 속도나 효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함과 현존, 그리고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알고리즘은 경험의 흐름을 매끄럽게 다듬고 통제하려 함으로써, 방해 요소를 최소화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종종 바로 그 '방해'의 순간들 속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이웃의 얼굴을 대면할 때, 취약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때, 그리고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말입니다. 시스템이 혼란(disruption)이라 규정하는 것을, 복음은 기회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더욱이 알고리즘적 통치는 양심 없이 작동합니다. 그것은 논리를 실행할 뿐,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복음은 양심을 인간과 하나님의 뜻이 만나는 장(場)으로 삼아 그 중심에 둡니다. 복음은 단순한 순응이 아닌 분별을 요구하며, 단순한 적응이 아닌 변혁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험은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규범적인 권위로 군림하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곧 판단 대신 계산이, 지혜 대신 예측이, 그리고 자비 대신 효율성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때, 인간 삶의 구조는 관계적 의무에서 멀어져 체계적 최적화를 향해 재편됩니다.


이에 대한 교정책은 기술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의 주된 준거틀로서 다시 확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핵심은 시스템이 무엇을 최적화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이 순간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은 오직 측정 가능한 것에 의해서만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옳은 것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앞서는 복음”이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삶의 재정립을 의미합니다.


계산에 앞서는 양심

수치적 지표에 앞서는 자비

예측에 앞서는 현존(Presence)

효율성에 앞서는 신실함


이러한 질서 속에서, 시간은 비로소 그 본연의 의미를 되찾게 됩니다. 시간은 통제해야 할 흐름이 아니라, 응답해야 할 선물로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쟁점은 알고리즘이 우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복음의 부르심에

우리가 ​​과연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27일  


> 모든 사상의 최종 척도로서의 복음

THE GOSPEL AS THE FINAL MEASURE OF ALL THOUGHTS


기독교는 이념적 범주에 굴복하지 않으며, 지배적인 사상 체계와의 대립이나 일치에서 정체성을 찾지 않습니다. 어떤 입장이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정통인지 이단인지, 수용되는지 소외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리를 판단하기에는 불충분한 부차적인 것입니다.


복음은 더 깊고 엄격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복음은 어떤 생각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는지 묻습니다.

교만 없이 진리를 말하는지,

잔혹함 없이 양심을 지키는지,

증오 없이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지,

겸손과 확신이 결합되었는지를 묻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해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공허할 수 있습니다.

용감해 보일지라도 자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오류를 거부할지라도 사랑을 구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기독교의 본질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복음의 척도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진리 속에 숨겨진 교만, 확신 속에 감춰진 폭력, 그리고 정의로 위장한 자기의를 드러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확신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십자가는 단순히 생각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생각이 옳은가?

오히려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생각이 회개를 거쳤는가?

자비로 다듬어졌는가?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


십자가의 표징, 즉 겸손, 은혜, 희생, 그리고 사랑을 지닌 것만이 

복음과 진정으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아무리 통찰력이 뛰어나더라도 불완전합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8일 


> 이념적 기독교의 실패

THE FAILURE OF IDEOLOGICAL CHRISTIANITY


이념적 기독교는 복음이 정치적, 문화적, 지적 체계에 종속되어 그 체계를 판단하기보다는 섬기는 도구로 전락할 때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은 더 이상 십자가의 변화시키는 실재에 집중되지 않고, 연대, 정체성 확립, 그리고 저항의 도구로 변질됩니다.


이러한 실패는 이념이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의 문제로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변질, 즉 회개가 입장을, 겸손이 확신을, 이웃 사랑이 집단 충성으로 대체되는 현상에서 비롯됩니다.


기독교가 이념화되면 진리는 더 이상 항복 속에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속에서 수호됩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자아가 죽는 곳이 아니라, 자아를 정당화하는 상징이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본질은 변질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은 더 이상 모든 측면을 자유롭게 대면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제약을 받고, 선택적으로 적용되며, 종종 무기화됩니다. 죄는 외적으로만 인식되고 내적으로는 무시됩니다. 정의는 타인을 위해 요구되지만, 정작 자신 안에서는 실천되지 않습니다. 자비는 선포되지만 구현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영적인 권위가 결여된 신앙 형태가 나타납니다. 확신에 차서 말하지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세상을 비판하지만. 세상의 권력, 배제, 자기 보존의 패턴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이념적 기독교의 실패는 주로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실패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입장을 확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복음은 우리의 입장에 집착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존재합니다.


기독교가 이념적 속박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진정한 증거, 즉 회개, 겸손, 자비, 이웃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어떤 체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살아있는 진리에 대한 순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복음의 긴급한 '지금' 

THE GOSPEL'S URGENT NOW


나중이 아닙니다.

소란이 잦아들 때도 아니고,

일정이 한가해질 때도 아니며,

마음이 준비되었다고 느껴질 때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복음은

저 멀리 있는 약속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요구로서 다가옵니다.

당신이 서 있는 바로 이 순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요청으로서 말입니다.


'지금'은 자비가 기다리는 곳이며,

진리가 당신 곁에 바짝 다가서는 곳이고,

사랑이 지나쳐 가버리기 전에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청하는 곳입니다.


이 순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 순간은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

그리고 영원히 열려 있지는 않을

한 문이 열리는 순간이라는 무게를 말입니다.


이 순간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순간을 미루지 마십시오.


그저 받아들이십시오.

복음은 추상적인 언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바로 '지금'이라는 긴급함 속에서 말합니다.

응답할 수 있도록

시간이 허락된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말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2026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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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26, 2026

LIFE THAT CANNOT BE TAKEN AWAY___ Sunday Street Worships & Gospel Demos with San Francisco Neighbors, April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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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pril 24, 2026

PROXIMITY AS THE PROOF OF THE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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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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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THAT STANDS WHEN CITIES FALL

(A Civic and Moral Witness in the Aftermath of Catastrophe)

The enduring landmarks of the 1906 disaster in San Francisco stand not merely as historical artifacts, but as a living grammar of memory, resilience, and collective obligation. They testify that when structures collapse, what remains is not only stone and steel, but the moral architecture of a people.

Friday, April 17, 2026

> THE APRIL 18, 1906, SAN FRANCISCO EARTHQUAKE (approx. 7.9 magnitude) and subsequent 3-day fire destroyed over 80% of the city, killing an estimated 3,000+ people and leaving over 225,000–300,000 homeless. The disaster destroyed roughly 28,000 buildings, caused over $400 million in 1906 damages, and prompted a massive, long-term refugee crisis. 

WHEN THE CITY BURNED, THEY BECAME OUR MEMORY___ A Dedication to the Victims of the 1906 San Francisco Earthquake (120 Years) 

> 도시가 불탈 때, 그들은 우리의 기억이 되었다___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120주년) 


대지가 무너져 내렸고—

도시는 그 뒤를 따랐다.

벽돌과 목재, 그리고 꿈이

먼지와 불길 속으로 스러졌다.


그러나 당신들은—

건물들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들은 잿더미 속에 섰다.

두 손에는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오직 숨결과—

살아남겠다는 의지만을 품고서.


어떤 이들은 달렸다.

더 이상 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리들을 가로질러.

어떤 이들은 기다렸다.

무자비하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서.

어떤 이들은 쓰러져 누웠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이들이—

두 세상의 경계에 남겨졌다.

죽은 것도 아니요,

온전히 회복된 것도 아닌 채—

도시가 미처 보지 못한 상처들을 안고서,

그들은 걸어갔다.


노동자였던 당신들—

불길이 삼켜버린 것들을 손수 지어 올렸던 당신들—

당신들은 두 번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한 번은 고된 노동으로,

또 한 번은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으로.


하룻밤 사이에 빈털터리가 된 당신들—

마치 가난이 갑작스러운 폭풍처럼 덮쳐온 듯했지만—

당신들은 다시 일어섰다.

세상이 친절해서가 아니라,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장애를 입은 당신들—

대지의 격변이 몸에 새겨놓은 흔적을 지닌 당신들—

당신들은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고통이 인간의 존엄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그리고 세상을 떠난 당신들—

그 이름들이 연기와 침묵 속에 삼켜져 버린 당신들—

당신들은 잊히지 않았다.


바람이 여전히 당신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고 있기에.

대지가 여전히 당신들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강철과 유리로 다시 지어진 이 도시가—

여전히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 위에 서 있기에.


당신들은 단순한 희생자를 넘어섰다.

당신들은 하나의 질문이 되었다.

모든 세대를 향해 던져지는 물음이 되었다.


대지가 다시 한번 갈라질 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우리는 상처 입은 이들을 외면하고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우리는 벽을 다시 쌓아 올릴 것인가—

아니면 서로의 마음을 다시 세워 올릴 것인가?


이 추모의 고요함 속에서,

당신들의 삶이 말을 건넨다.

단지 세상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초대하기 위해서.


더 가까이 다가서라고.

더 깊이 사랑하라고.

불길이 덮쳐올 때에도—

사람들을 잊지 않는 도시를

함께 지어 올리자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대지가 흔들리던 그날을 온몸으로 견뎌낸 당신들이여.


당신들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빛—

여전히 타오르며—

우리에게 손짓하는

빛입니다.

이웃이 되라고,

다시 이웃이 되라고,

더 좋은 이웃이 되라고___


전도인: 이  건 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2026년 4월 17일 


> FOR THE ONES LEFT IN THE RUINS

   폐허 속에 남겨진 이들을 위하여



도시가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돌들은 기억 없이 떨어졌고,

불길은 차별 없이 번져갔습니다.


그리고 당신—

당신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 

바로 그곳에 남겨졌습니다.


승리 속에 실려 나오지도,

복구된 것들 사이에 이름이 오르지도 못한 채,

다만 서서—

혹은 간신히 버티며 서서—

남아 있는 잔해들 속에 머물렀습니다.


폐허가 당신의 주소가 되었고,

침묵이 당신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말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상실의 언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지어 올릴 수 없는 것들을,

당신 삶의 연약한 틀 속에 품고 살아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쳐 지나가며,

사라져 버린 것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

당신은 끝내 견뎌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친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무언가가 사라지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역사가 하마터면 잊을 뻔했던 이들입니다—

시간이 흘러 떠나간 뒤에도 그 자리를 지켰던 이들,

불길이 그 이름을 잃고 사그라든 뒤에도

그 무게를 묵묵히 감당했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당신의 존재는 남아 있습니다.

도시조차 침묵시킬 수 없는

조용한 진실처럼 말입니다:


뒤에 남겨진 것들 또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


부서져 버린 것들 또한

존엄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진실.


폐허 속에서 끝내 견뎌낸 것들이

언젠가 자비의

주춧돌이 될 수도 있다는 진실을 말입니다.

(마태 5장 7절)


전도인: 이  건 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2026년 4월 17일


> WHAT THE FIRE COULD NOT DESTROY___ 

On Memory, Dignity, and the Endurance of Merciful Obligation

불길이 파괴할 수 없었던 것들___

기억, 존엄성, 그리고 자비로운 의무의 지속성에 대하여

도시의 파괴는 물질적 힘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시스템은 마비되며, 눈에 보이는 안정의 구조물은 잿더미로 변합니다. 그러나 대재앙은 더 깊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불길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둘러싼 사건들은 물리적 기반 시설은 파괴될지라도 인간 존엄성, 상호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의무라는 근본적인 가치는 파괴를 넘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안정된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속성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간 삶의 영원한 조건입니다.


대재앙 이후, 집을 잃고, 부상을 입고, 가난해진 사람들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변 공동체의 도덕적 책임 또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사회 구조의 붕괴는 이러한 의무의 시급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취약계층에 대한 돌봄이 선택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의 근본적인 요구 사항임을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지속되는 노숙과 사회적 방치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자원 부족이나 복잡한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이미 드러난 원칙들, 즉 안정된 시기에도 여전히 구속력을 갖는 원칙들을 실천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불이 휩쓸고 지나간 것"이야말로 보존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즉, 공동의 인간성에 대한 인식, 고통에 외면하지 않는 자세, 그리고 존엄성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구조에 대한 헌신입니다.


사회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을 건설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무엇을 포기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 REPENT: THE FIRE REVEALED WHAT WE LOVED MOST___

On Exposure, Conscience, and Returning to What Endures

회개하라: 불은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것을 드러냈다___

드러남, 양심, 그리고 영원한 것으로 돌아가기

불이 닥쳤을 때,

불은 논쟁하지 않았다.

불은 협상하지 않았다.

불은 그저 드러냈을 뿐이다.


우리가 쌓아 올린 것은 불타 없어졌다.

우리가 믿었던 것은 무너져 내렸다.

우리가 남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도시는 환상을 벗어던졌다.


불길은 진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냈다.


불길은 우리가 마음을 쏟았던 것을 보여주었다.

불길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드러냈다.

불길은 우리가 잃을 수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쌓아 올린 것이 

바로 언젠가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라져 가는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배척하는 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결국 우리는 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영원한 것을 사랑한다면—

자비를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한다면,

불타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면—

불이 닥쳐와도,

무언가는 남을 것이다.


회개는 파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회개는 이미 드러난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용기이다.

회개는 마음을

영원할 수 없는 것에서

영원해야 하는 것으로 돌리는 것이다.


불은 이미 말했다.

역사는 이미 증언하고있다.


남은 질문은 이것뿐.

우리는 계속해서 불타는 것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남아 있는 것으로 돌아갈 것인가? 

(Psalm 136:1; Romans 8:38-39)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April 17, 2026 


> JUDGMENT IN THE BUILT ENVIRONMENT:

Catastrophe and the Exposure of Civic Priorities 

(On Urban Form, Public Responsibility, and the Measure of a City)

건축환경에서의 판단: 재난과 시민 우선순위의 드러남

(도시 형태, 공공 책임, 그리고 도시의 척도에 대하여)



재난은 단순히 기반 시설에 피해를 주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내재된 도덕적 논리를 가시화합니다. 도시가 재난, 이주, 또는 체계적 위기로 흔들릴 때, 건축환경은 중립적인 배경으로서의 기능을 멈추고 집단적 우선순위의 물질적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희생하며, 누가 위험에 노출되는지는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가치, 의미, 그리고 의무에 대한 이전 결정의 공간적 표현입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둘러싼 역사는 완전한 파괴의 순간이 이러한 우선순위를 드러내고 재편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속한 임시 주택 제공, 공공 공간의 일시적인 피난처 전환, 그리고 이재민들을 도시 생활의 중심에 두려는 의지는 시민 권위의 정당성이 인간의 취약성에 즉각적이고 존엄하게 대응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반영했습니다.


반면, 현대 도시 환경은 종종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배제적인 설계, 방어적 기반 시설, 또는 가시성의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취약한 사람들을 밀어내거나, 숨기거나, 소외시키는 공간 배치는 시민 질서 내에서 누구의 존재가 용인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으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배치는 단순히 공간을 조직하는 것을 넘어, 윤리적 결정을 물리적 환경에 각인시킵니다.


따라서 "건축 환경에서의 판단"은 이중적인 현실을 의미합니다. 첫째, 도시는 보호와 노출의 분배를 통해 거주자들을 판단합니다. 둘째, 건축 환경은 사회가 정의, 존엄성, 그리고 공동 책임이라는 요구에 얼마나 부합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에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회복력이나 번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계층을 고려하여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재난은 이러한 기준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재난은 중립적인 모습을 벗겨내고, 원칙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현실에서 결정되어 온 것들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적절한 대응이란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재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설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우선순위를 재검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도시는 ‘노출’의 단계에서 ‘변혁’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미래의 모습이 거리의 보존이 아닌, 그 안에 거주하는 모든 이의 존엄을 수호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의무의 실현을 반영하도록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 THE BURNING CITY AS DISCLOSURE EVENT

   불타는 도시, 그 속에서 드러난 진실



도시가 불타올랐을 때,

그것은 진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진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불길은 계시가 되었고,

연기는 베일을 걷어냈다.


구조물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

잿더미 속에 드러났다.


한때 우리를 나누던 벽들은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유지되던 거리감은

가까움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곳,

무방비된 공간에서—

이웃이 나타났다.


추상적인 존재도, 정책도 아닌,

그것은 현존하는 존재였다.

상처 입고, 보이고, 부인할 수 없는 존재로.


재앙은 의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무를 감추던 변명거리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언제나 요구되었던 것이

중재 없이 드러났다.

가까이 다가가고,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를 품는 것.


방어막을 잃은 도시는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을 때,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납니다.


완전히 드러난 상황 속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도, 위임된 돌봄도,

중립적인 공간도 없습니다.


오직 이것뿐입니다.


세상이 무너진 곳에 서서,

이론이 아닌,

함께 있어 달라는 이웃의 부름.


그리고 그 함께 있음으로부터,

새로운 도시가 시작됩니다.

먼저 돌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머물기로 하는 결정에서.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 Urban Destruction and Normative Critique: Disaster and the Theological Limits of Structured Indifference___ On Catastrophe, Responsibility, and the Moral Boundaries of Civic Order

도시 파괴와 규범적 비판: 재난과 구조화된 무관심의 신학적 한계___ 

재난, 책임, 그리고 시민 질서의 도덕적 경계에 대하여


도시 파괴는 흔히 안정적인 체계를 교란하는 개별적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재난은 단순히 체계를 교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재난은 시민 구조에 내재된 규범적 가정을 드러내고, 통치 체계가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무관심을 얼마나 묵인하고, 은폐하고, 혹은 정상화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역사적 경험은 재난이 도덕적 명확화의 순간으로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일상생활의 패턴이 중단될 때, 사회 조직의 근본적인 논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아니라, 그러한 조건이 붕괴될 때 그 체계가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입니다.


"구조화된 무관심"이란 법률, 행정, 공간 등 제도적 장치가 특정 집단의 고통을 의미 있는 중단 없이 지속하도록 방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돌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규정 준수의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관심과 자원을 불균등하게 분배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난은 이러한 구조화된 무관심에 한계를 드러냅니다. 절차적 거리를 없애고 추상화, 지연, 위임에 의존하는 대응의 부적절함을 폭로합니다. 광범위한 노출 상황에서 취약 계층의 도덕적 요구는 더 이상 결과 없이 미룰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제도적 특징으로 용인되었던 것이 규범적 실패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노출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이주, 부상, 상실의 상황에서 이웃이라는 존재는 정책 틀 내의 변수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이는 중재를 거부하고 응답을 요구하는, 양심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요구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모든 시민 질서는 실질적인 한계뿐 아니라 도덕적, 신학적 한계에도 부딪히게 됩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지속되는 도시 불평등과 노숙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고려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문제는 단순히 역량이나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필요를 해결하지 않고 가시성만 내세우는 시스템은 재앙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만드는 바로 그 무관심을 영속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 파괴에 대한 규범적 비판은 단순히 회복력이나 복구를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노출과 보호의 양상을 규정하는 구조들을 재검토하고, 인간의 존엄성·친밀성·공동의 책임을 긍정하는 원칙에 입각하여 그 구조들을 재정립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요구합니다.


그러한 재정립의 척도는 명확합니다. 재건된 도시의 모습이 여전히 무관심을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재난을 통해 드러난 한계를 직시하고 도시의 경계 안에서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보호받지 못하거나, 버려지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 THE THEOLOGY OF RUIN___ 

Catastrophe, Abandonment, and the Reappearance of the Neighbor

파멸의 신학___ 재앙, 버려짐, 그리고 이웃의 재등장 


도시가 무너질 때, 그것은 단순히 밖으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으로도 열립니다.


거리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지며, 질서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파멸은 구조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진실의 폭로입니다.


안정이라 불리던 것은 질서로 드러납니다.

거리라 불리던 것은 방치로 드러납니다.

진보라 불리던 것은 망각으로 드러납니다.


재앙의 순간, 버려짐은 가면을 벗습니다. 더 이상 관리되지도, 미뤄지지도, 정책 언어로 포장되지도, 

절차로 완화되지도 않습니다. 그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누군가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


하지만 바로 그 드러남 속에서 무언가가 돌아옵니다.

이웃이 다시 나타납니다.


어떤 범주로도, 통계로도, 대규모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도 아닌, 모든 것을 가로막는 존재로. 한때 추상적이었던 곳에 얼굴이 나타납니다. 침묵이 있던 자리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축소되기를 거부하는 생명.


폐허는 만남이 불가피해지는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회피의 길은 잔해 아래 묻히고, 우리가 유지했던 거리는 근접함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더 이상 고통을 둘 수 있는 "저곳"은 없습니다. 오직 "여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여기"에서, 질문은 더 이상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남을 것인가?

아니면, 비록 공개된 장소일지라도, 다시 한번 스쳐 지나갈 것인가?


재앙은 의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를 감추었던 조건들을 제거할 뿐입니다. 이웃의 부름은 항상 존재했지만, 도시가 온전했을 때는 외면하기가 더 쉬웠습니다. 이제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 부름은 아무런 방해 없이 울려 퍼집니다.


신학은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확신이 아니라 드러냄 속에서, 거리가 아니라 가까움 속에서, 설명이 아니라 응답 속에서.


폐허 속에서 신은 무너진 구조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남겨진, 아무런 보호도, 아무런 방어막도 없이, 부인할 수 없는 생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은 도시가 무너진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 있는 모습 속에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돌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다가 가기로 한

결정 속에___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7일 


> Toward a Post-Catastrophic Normative Order: Mercy, Proximity, and the Reconstruction of Urban Ethical Systems___ On Rebuilding After Exposure, and the Moral Reordering of the City

재난 이후의 규범적 질서를 향하여: 자비, 근접성, 그리고 도시 윤리 체계의 

재건___ 노출 이후의 재건과 도시의 도덕적 재정립에 대하여


재앙은 단순히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재앙은 무시할 수 없는 절박함으로 도시의 삶을 형성해 온 근본적인 우선순위를 폭로합니다. 재난, 이주, 또는 시스템 붕괴와 같은 혼란 이후에는 더 이상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재앙 이후의 규범적 질서는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위기 속에서 드러난 조건들은 사건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인해 드러난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취약성, 불평등, 그리고 방치는 붕괴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재앙은 단지 그것들을 감추고 있던 구조들을 제거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현실을 다루지 않고 물리적 시스템만을 재건하려는 모든 재건 시도는 광범위한 노출을 초래한 바로 그 조건들을 되살릴 위험이 있습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역사는 대안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속한 피난처 제공, 즉각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공공 공간의 재구성, 그리고 거리보다 근접성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눈에 보이는 고통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 새로운 도덕적 질서를 반영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비록 임시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오늘날에도 규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원칙들을 구현했습니다.


그러한 원칙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비: 자의적인 호의가 아니라,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구속력 있는 지향성으로, 구체적인 필요에 대한 물질적 대응을 요구합니다.


근접성: 고통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관리하게 만드는 거리두기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인간의 취약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곳에서 의무가 가장 분명하게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재건: 이전의 체제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부합하도록 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재정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은 함께 재난 이후의 윤리적 틀의 기반을 형성합니다. 이 틀은 도시 거버넌스의 정당성이 효율성이나 회복력뿐 아니라, 위기와 안정기 모두에서 이러한 약속을 지켜나갈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음을 인식합니다.


현대 도시에서 여전히 만연한 노숙 문제와 구조적 불평등은, 이러한 틀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당면 과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것입니다. 즉, 드러난 의무를 지속 가능한 제도적 실천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책 조정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시민적 상상력의 재정향을 요구합니다. 취약성을 더 이상 주변적인 요소로 치부하는 대신, 도시 생활의 설계와 평가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는 그러한 재정향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의 척도는 회복의 속도나 개발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건된 도시가 대재앙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 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진실이란 바로, 정의로운 사회란 자비가 실천되고, 서로 간의 유대가 포용되며, 그 누구도 돌봄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April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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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16, 2026

> GOOD NEWS FOR BROKEN STREETS

파괴된 거리를 위한 기쁜 소식

성경 복음은 질서정연한 공간, 도덕적 성공, 혹은 종교적인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삶이 산산이 조각난 곳, 투쟁으로 길이 닳아빠진 곳, 체제가 무너진 곳,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쉽게 무시되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파괴된 거리”는 신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임재가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복음은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어떤 조건도 그 누구도 은혜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곳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으로 파고듭니다. 


이 복음은 이러한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언합니다. 인간을 소모품, 보이지 않는 존재, 또는 질서, 효율성, 혹은 겉모습보다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모든 틀을 거부합니다. 사회가 배제의 경계를 긋는 곳에 복음은 자비로 그 경계를 다시 그습니다.


또한 복음은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부여합니다. 복음은 책임감 없이 거리를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목격하는 것은 곧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필요를 인식하는 것은 그에 응답할 책임을 맡는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심과 연민, 그리고 구체적인 돌봄의 행위를 통해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거리를 위한 기쁜 소식”은 선언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처가 보이는 곳에 함께하신다는 선언이며,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거리는 단순히 필요가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은혜가 드러나고 요구되는 만남의 장소가 됩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GRACE WRITTEN IN THE DUST OF THE CITY

도시의 먼지 속에 새겨진 은혜

우리는 습관적으로 소음이 가장 적고 전망이 가장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고요한 성소나 고난 너머 높은 곳에서 그분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 복음은 그러한 본능을 일축합니다. 복음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훨씬 더 마음을 움직이지만, 훨씬 더 희망적인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신 곁에 계십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저 멀리 지평선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거리를 보십시오.


복음은 손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떠다니는 추상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바로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지문이 창조자를 드러내듯, 하나님의 임재는 흔적을 남깁니다. 작고, 종종 숨겨져 있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흔적들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르기도 전에 내밀어지는 손길에서,

혼돈 속에서 예상치 못한 고요함이 찾아올 때,

절망이 승리하지 못하게 막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내면의 조용한 목소리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거리를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능력, 기록하고, 치유하고,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돌판에 글을 쓰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글을 쓰십니다. 기적을 행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비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전환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단지 바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은혜를 그저 관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은혜 안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 우리의 사명


우리는 그저 이 거리를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분별합니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얼굴은 영원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모퉁이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거리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절망과 희망이 만나는, 은혜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려 애쓰는 투쟁의 현장입니다.  


열린 눈으로 이곳을 걷는다는 것은 창조주의 흔적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형상,

배척당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존엄성,

체계가 무너진 곳에서 조용히 지속되는 사랑의 흔적을 말입니다.


> 도전

복음을 단순히 말로만 전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은혜가 되십시오.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분의 표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분을 드러내라는 초대를 거부하면서, 끝없이 그분의 증거를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당신 곁에 누군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갈망과 피로, 침묵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런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경청하는 귀,

인내심 있는 존재,

가치를 따지지 않는 자비.

당신은 그들이 기다리는 손길일지도 모릅니다.


> 마지막 말씀



이 거리는 무신론적인 곳이 아닙니다.

조용히, 꾸준히, 그리고 분명하게 은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다르게 걸으십시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구체적으로 사랑하십시오.

충실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당신의 삶이 그 대답의 일부가 되게 하십시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THE TOUCH OF HEAVEN IN THE MIDDLE OF THE STREET

거리 한복판에 닿은 천국의 손길

천둥소리와 함께 찾아오지 않습니다.

나팔 소리가 하늘을 가르지도 않고, 빛이 하늘을 휘감지도 않습니다. 차들은 멈추지 않고 지나가고, 엔진 소리는 윙윙거리고, 발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집니다. 도시는 그 리듬을 유지하며, 무언가 신성한 것이 그 소음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조바심을 내고 시선을 돌리는 거리 한복판에, 천국이 낮게 다가왔습니다. 위도 아니고, 저 너머도 아닌, 바로 우리 안으로, 우리가 서둘러 지나치는 공간 안으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 안으로, 우리가 외면하려 애쓰는 삶 속으로.


그것은 마치 방해처럼 다가왔습니다.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시선이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뻗어오는 손길.

불편함이 물러서라고 해도 물러서지 않는 존재감.

웅장하지도 않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분명한 무언가.

천국의 손길.



한때 우리는 천국이 먼지와 멀리 떨어져 인간 삶의 무게에 물들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낯선 이들의 평범한 스쳐 지나가는 순간, 천국은 또 다른 본성을 드러냅니다. 천국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완벽함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천국은 내려옵니다.

사물의 한가운데로,

끊어진 대화 속으로,

불안정한 삶 속으로,

일상 속 표면 아래 숨겨진 말 못 할 아픔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천국이 닿을 때, 항상 즉시 치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조용하고 어쩌면 더 오래가는 일을 합니다.

바로 존재감을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투명인간처럼 여겨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관심의 무게를 느낍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던 여자가 잠시나마 기대가 어리석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닫혀 있던 마음이 빛이 들어올 만큼 충분히 열립니다.


이것이 천국이 쓰는 방식입니다.


고통을 없애는 기적이 아니라,

고독을 깨뜨리는 자비로 말입니다.


거리는 다시 한 페이지가 됩니다.

단지 판단을 위한 페이지가 아니라,

은혜가 천천히 새겨지는 페이지가 됩니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관찰하고, 머무르는 사람은—

그 글의 일부가 됩니다.


작가로서가 아니라,

도구로서.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손길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내지 않은 무게, 그들이 빚어내지 않은 부드러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지며, 주어짐으로써 계속 이어집니다.


하늘은 닿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움직입니다.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한 순간에서 또 다른 순간으로,

고요하게, 신실하게, 요란한 볼거리 없이.

그 질문이 달라지는 순간까지.

더 이상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하늘이 나를 통과하도록 허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그리고 바로 그곳, 거리 한복판에서—

소음과 분주함, 그리고 외면하는 오랜 습관들 속에서—

그 대답은 말이 아닌,

그 자리에 머물기로 선택한 삶들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비록 아주 잠시일지라도,

하늘의 손길이 되어주는 삶들 속에.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Grace Beyond the Sanctuary — 

Ecclesial Decentralization, Spatial Theology, and the Limits of Institutional Mediation

성소를 넘어선 은혜 — 교회 분권화, 공간 신학, 그리고 제도적 매개의 한계

성경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내부, 제도적 구조, 또는 규정된 신성한 공간에 국한되지 않음을 확증합니다. 은혜는 성소를 초월합니다. 건축물에 의해 제한되거나, 접근에 의해 좌우되거나, 형식적인 종교 체계를 통해서만 매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능동적이고, 현존하며, 작용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분권화를 요구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정해진 경계 안에 위치한 모인 기관으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펼쳐지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사역에 참여하는, 흩어져 보내심을 받은 몸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학적 의미의 중심은 고정된 통제 장소에서 역동적인 현존의 장소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이동에는 모든 장소가 신성한 만남의 잠재적 장소라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공간 신학이 필요합니다. 거리, 변두리, 그리고 간과되기 쉬운 환경은 은총이 임하는 부차적이거나 부족한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곳들은 은총이 가시화되고, 투쟁의 대상이 되며, 구체화되는 주요한 맥락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적극적인 임재를 고려할 때, 신성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의 구분은 상대화됩니다.

동시에 이러한 관점은 제도적 매개의 한계를 명확히 합니다. 교회의 구조, 전례, 그리고 성례는 여전히 의미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모든 방식을 다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도적 형태는 하느님의 임재를 독점하거나 은총에 대한 접근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주장이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제기될 때, 하느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가리고 교회의 선교적 소명을 저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할은 은총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신성한 공간을 통제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속적인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데서 나옵니다. 이러한 참여는 인간의 필요와 하느님의 자비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근접성, 주의 깊음, 그리고 반응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따라서 "성소 너머의 은총"은 신학적 주장과 교회적 명령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이미 제도적 경계를 넘어 존재하며, 교회는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그러한 공간들을 향해 끊임없이 방향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소는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 위치가 재정립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은혜의 유일한 중심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마주하고, 인식하며, 삶으로 살아내는 수많은 장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The Kingdom of God Stands Against Managed Abandonment

하나님의 나라는 계획적인 방치에 맞서 싸웁니다.


많은 도시에는 은밀한 합의가 있습니다. 

말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종종 묵인됩니다. 

고통은 부정되지 않고, 관리될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질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복음은 이것을 다르게 부릅니다.

복음은 이것을 방치라고 부릅니다.

항상 폭력적인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의도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구조화되고, 반복되고, 용인됩니다.



계획적인 방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체계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처리한 것이다.”

“여기에 없는 한,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은밀한 체계에 말합니다.

공손하게도, 멀리 떨어져서도 아닙니다.

권위를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방치와 협력하지 않습니다.

방치에 맞서 일어섭니다.


사람들이 소외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옵니다.

삶이 감춰진 곳에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삶을 드러냅니다.

존엄성이 부정당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그것을 회복시켜 줍니다.

이론뿐 아니라, 실제로 임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안락함을 중심으로 사역을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피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이미 정해진 경계선에 서서,

그 경계선을 넘어서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한 세부 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방향입니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계획적인 방치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고통을 감추는 시스템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거리를 두는 것을 무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멀리하는 것을 연민이라고 부르고, 

침묵을 책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이 피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동참하든지, 아니면 저항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단순히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구조를 부수는 것입니다.

세상이 물러설 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체계가 철수할 때에도 곁에 머물기 위해.  


시야에서 사라진 모든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의 눈에 온전히 보인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___ 거리가 기억하는 것은 정책이 잊는 것이고, 이웃이 짊어지는 것은 구조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진정한 왕국은—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굳건히 서 있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것은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와 같이 행하도록 부르십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The Street as Locus of Divine Action and Ecclesial Responsibility

(거리, 하나님의 역사와 교회의 책임이 이루어지는 장소) 



우리는 하나님을 조용한 곳, 즉 벽 안, 질서 정연한 곳, 이미 모인 사람들 속에서 찾도록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성경 복음은 우리의 관심을 바깥으로, 열린 공간으로, 미완성된 곳으로, 삶이 정돈되지 않고, 드러나는 곳으로 이끌어갑니다.


거리는 하나님의 역사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무대 중 하나입니다.


거리가 깨끗해서도, 안전해서도, 쉬워서도 아닙니다. 바로 그곳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필요가 구조물 뒤에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존엄성이 눈앞에서 시험받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이론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필요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시고, 침묵이 감도는 곳에 말씀하시고, 버려짐이 일상이 된 곳을 회복시키십니다. 혼잡하고, 부서지고, 소외된 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장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거리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거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동시에 교회의 책임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은혜가 이미 역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마주하는 공간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소명은 단순히 은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물러서는 곳에 함께 있는 것,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에 있는 것,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는 곳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적인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신앙을 시험하는 장입니다.

거리에서는 믿음과 실천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평가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가까이 있을 때 드러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함께 있을 때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평범하고, 어렵고, 간과되기 쉬운 세상 속으로 보내졌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하신 곳에 하나님을 데려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역사하고 계시는 곳에서, 그분을 알아보고, 겸손과 용기로, 그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먼저 이렇게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다시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분은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미처 보지 못할 뻔했던 얼굴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뻔했던 누군가의 필요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계획을 불쑥 가로막는, 그 순간 속에서 말입니다.

더욱 깊은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 머물러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책임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로 기꺼이 발을 내디디겠습니까?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서—

바로 그 거리 위에서—

하나님의 일은 이미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The Kingdom’s Immediacy and the Street-Level Manifestation of Grace  

(하나님 나라의 직접성과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은혜)

성경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실현될 먼 약속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현재의 현실임을 확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직접성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관계적이며, 신성한 공간이나, 이상적인 환경에만 하나님의 임재를 한정하는 모든 전제를 뒤흔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 주장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며, 그분의 임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접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드러납니다. 일상 속, 소외되고 간과되는 것들 속에서, 은혜가 나타납니다. 존엄성을 회복하는 행위, 무관심에 저항하는 임재, 그리고 방치의 패턴을 깨뜨리는, 자비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윤리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의 표징입니다. 


일상 속의 은혜는 하나님 나라가 깨어진 상태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타납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민과 인정, 그리고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에 기반한 대안적 질서를 세움으로써, 그러한 상황들에 맞섭니다.



이러한 현실은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를 제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즉각성은 수동적인 관찰의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은혜를 경험한다는 것은 참여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는 선포에 그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고, 돌보고, 신실하게 함께하는 삶을 통해 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즉각성과, 거리에서의 은혜의 나타남"은, 신학적 주장과, 실천적 명령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인간 삶의 가시적인 조건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나타남은 부분적으로는, 개인이 받은 은혜를, 실천하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거리는 단순히 필요가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도전받고, 가시화되는 장소가 됩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 MISSION WITHOUT WALLS — 

Proximity, Power, and the Normative Limits of Ecclesial Containment  벽 없는 선교 — 근접성, 권력, 그리고 교회적 틀의 규범적 한계 

성경 복음은 선교를 본질적으로 외부 지향적이고, 근접하며, 구체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복음은 제도적 경계 안에 갇히거나 통제된 환경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앙 모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특히 인간의 취약성이 가장 드러나는 공간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벽 없는 선교”는 전략적 선호가 아니라, 신학적 필연성을 의미합니다.


그 핵심에는, 근접성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난 것처럼, 신의 작용은 근접성, 즉 인간 삶의 조건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추상화, 위임, 또는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삶의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은,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접성은, 권력의 문제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종교 활동을 억제, 규제, 또는 중앙집권화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에 신실하게 참여하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의 권력이, 접근, 공간, 또는 정당성에 대한 통제로 행사될 때, 은총의 즉각성을 약화시키고, 선교를 증거가 아닌 유지로, 재정의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제한적 통제에는 규범적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제도적 형태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기능적으로 유용하지만, 하느님의 임재를 가두거나 독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은총의 작용을, 지정된 신성한 공간이나, 형식적 구조에 한정하려는 주장은, 신학적 근거를 넘어섭니다. 그러한 제한은, 하느님의 활동의 보편성과, 더 넓은 세상에 참여해야 할 교회의 책임을, 모두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선교는 분산되고 참여적인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가까이 있고, 관심을 기울이며,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를 통해 복음의 현실을 구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교회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벽 없는 선교"는, 두 가지 불가분의 주장을 확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제도적 경계를 넘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교회의 정당성은, 그 능력이 드러나는 환경 속에서, 즉 교회가 그 환경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을 세상 *속으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게됩니다. 그분은 바로, 당신의 현존 그 자체로, 교회를 자신의 울타리 너머로, 끊임없이 불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전도자: 이  건 씀  

St GMC Corps

2026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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